top of page

​마자

@MAJA_2CH

Thursday, 5:30 PM

목요일 오후 5시 30분은 특별한 손님을 위해 비워진 시간이다. 올해로 꼭 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세션은 늘 같은 시간에 진행되었다. 그에게 어떤 개인적인 고난이 밀어 닥치든, 지구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상담사가 결국 천체물리학과에 진학 원서를 들이밀었을 때부터, 새로운 외계인이 하늘을 뚫고 처들어오거나, 오랜 지인의 장례식 주간, 혹은 새로운 어벤져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등장하던 날에도 상담사는 방문객을 맞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목요일 오후 5시 30분은 나름대로 상담사와 방문객 모두에게 제법 특별한 시간이었다. 짧은 시곗바늘이 다섯 시를 가리킬 즈음이 되면 상담사는 진한 블랙 커피 한 포트를 새로 내렸고, 그럴 때마다 방문객은 입매를 밀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첨언하는 것이다. “오늘도 커피 내음이 좋군.” 그러면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다. “신경을 좀 썼죠. 언제나처럼요.”

모든 상담을 사무실에서만 진행한 건 아니었다. 소매치기와 한참을 싸우다 지쳐 쪼그려 앉아 있던 골목에서도, 자동차 한 대만을 가지고 호기롭게 떠났다가 길을 잃었던 스톤헨지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도, 심지어 극비로 지정된 곳에서마저도 상담은 매번 같은 시간에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상담사는 매번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해 커피를 준비했다. 그게 논리적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달시 루이스의 손에는 커피 포트가 들려 있다.

상담사는 문득 고개를 돌려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는 단정한 명패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적힌 이름은 짧고 간결했다. 달시 루이스. 단정한 고딕체로 새겨진 이름 옆은 세월의 흔적인지 손때인지 모를 것이 배겨 검게 물들어 있었다. 뭐, 달시는 그런 걸 크게 신경 쓰는 부류는 아니었다.

다섯 시 반이 되자 손님이 찾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이 문제의 ‘방문객’은 이미 스물 네 번째 방문에서 자신이 얼마나 기척을 잘 감추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던 전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 달시는 이것을 일종의 ‘물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잠시 뒤로 주제를 미뤄두었다. 이 상담에는 불문율이 제법 많았다.

실제로 그는 상담사조차 아니었다. 십 년하고도 조금 더 이전에는 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보조 인턴이었다가, 천체 물리학에 코가 꿰여 팔자에도 없는 박사 학위를 따고, 정부에서 극비리에 진행하는 임무에 참가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본래 계획했던 것처럼 사회과학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면 언젠가 상담사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부를 만한 적절한 직책조차 없었다. 오히려 이런 만남은 그렇기에 이어졌을 지도 몰랐다.

오늘도 어김없이 방문한 객은 길고 검은 가죽 소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 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손이 꽤 커 잔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달시는 사무실의 중앙, 유리 탁자 앞에 앉아 밀린 업무가 적힌 종이 쪼가리들을 훅훅 넘겼다. 세션이라기에는 별다른 긴장감이나 준비를 찾아볼 수조차 없었으나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지극히 익숙한 듯했다.

검은 머리의 객이 먼저 운을 띄웠다.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 줄 아나? 오백 서른번이야, 루이스 선생.”

“십 년하고도 몇 주가 흘렀다는 뜻이기도 하죠, 오딘슨 씨.”

시선이 그제야 종이를 떠나 내담자에게 닿는다. 오딘슨이라 불린 객은 언제나와 같은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달시가 미간을 장난스레 좁히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처음 왔을 때와는 달라진 게 없어 보이네요.”

“십 년은 짧은 시간이지.”

“인류에겐 충분히 긴 시간이에요. 당신 같은 외계인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신’이라고 불러주면 좋을 것 같은데.”

“오, 상담의 첫번째 원칙.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 권력관계가 형성되어선 안 된다. 이걸 까먹었을 줄은 몰랐는데요.”

“언제부터 그렇게 훌륭한 테라피스트였다고?”

“아마 지금부터?”

시시껄렁한 농담에는 이렇다 할 무게가 없었다. 앞선 내용이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상담이라기에는 오랜 친구를 만나 근황을 나누는 것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가벼운 문장 속에서, 그들은 소파에 몸을 편하게 기댄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비밀 하나 알려주자면, 아스가르드 인들도 나이가 들어.”

“하지만 당신은 아스가르드 인이 아니라면서요? 서리거인, 그런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던가?”

로키의 표정이 오묘해졌으나, 그런 건 지금 신경쓸 게 아니라는 듯 손을 들어 가볍게 휘저었다. 들려 있던 커피잔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백하고도 서른 번쯤 보았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어쨌든, 다음이면 오백 서른 한 번째야. 그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지.”

그 말에 달시가 기억을 더듬어 첫번째 만남을 복기했다. 끝나는 일자 대신 회차를 지정했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송별 케이크라도 준비하는 건데. 하지만 우리의 내담자는 커피 한 잔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듯 보였다. 

“어디로요? 브랜-뉴-아스가르드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고.”

“아, 그 구닥다리 동네로? 절대 사양이야.”

“다른 장소가 있나봐요.”

“있지.”

그는 바로 답하는 대신 약간의 뜸을 들였다. 이윽고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저 사람이 저런 어조로 말하지 않는 때가 있기는 할까? 달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간의 끝으로.”

“그게 개념적인 장소가 아니라 실존하는 장소였다면 차기 연구 주제로 쓸 만하겠네요.”

“오, 루이스. 이걸 이론화 시킬 수 있다면 자넨 단번에 미드가르드의 군림자가 될 수 있을 걸.”

“하지만 알려주지 않을 거죠?”

“아쉽지만, 그래. 당장의 인간이 알기에는 방대한 지식이거든. 혹시 자네가 또 세상을 부술 만한 혁신적인 발명이라도 한다면, 그때는 나도 손 쓸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기엔 별별 얘기를 다 했는데요. 오백 서른 번동안.”

실제로 로키는 어디서 듣고 온 이야기, 혹은 직접 본 것들을 달시에게 미주알고주알 조잘댔다. 매주 목요일 다섯시 반마다 예정되어 있던 상담이란 사실상 로키 오딘슨이 겪거나 살펴본 거대한 일대기를 들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달시는 그동안 피라미드 안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 신들의 대리자가 알고보니 인격이 분리되어 있었다던가, 시간선에서 잊혀지기를 택하고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영웅의 이야기라던가, 사실 지구는 하나의 알에 불과하며 곧 엄청나게 강인한 고대의 존재가 깨어날 거라는 둥, 하지만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둥 그런 말들을 했었다. 들었던 이야기 중 몇가지는 종종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해서, 달시는 어느 순간부터는 이 얘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보다는 적당히 벌어질 수도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장난과 거짓말의 신 뒤에 예언가라는 수식어가 하나 정도 붙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어 보였다.

가끔은 그가 잠시 몸담았던 ‘회사’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다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은, 조금은 후련해보이면서도 어딘가 떨쳐내지 못한 미련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달시는 이렇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주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

그러나 로키는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매주 목요일마다의 세션을 반복하며 십 년하고도 두 달이 넘는 시간마다 달시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상실감을 채우려는 듯했다. 그는 로키가 왜 자신을 택했는지, 왜 자신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수한 대화 사이에는 분명한 공백이 있었지만 구태여 채울 필요는 없었다. 외려 그렇기에 더 진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달시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일전에는 묻지 않았던 것을 입에 담았다.

“외로워질 텐데.”

“당신이, 아니면 내가? 당신이라면 걱정 마, 언제든 보고 있을 거거든.”

“으, 그건 조금 스토커 같아서 싫은데요.”

“십 년쯤 보니 말도 이제 쉬워졌어?”

달시의 앞에 놓인 커피 잔은 이미 비워진지 오래다. 커피 포트 속의 커피도 어느새 미적지근하게 식어 더는 일전과 같은 향을 남기지는 못했다. 적막한 사무실 안에서 달시는 소서 위의 잔을 돌리듯 어렵잖게 화제를 바꾼다.

“마지막에는 당신이 정말 올 줄 알았어요. 나를 보러 온다는 얘기는 아니고, 지구나 이런 곳들을 ‘직접’ 보러 올 줄 알았달까?”

“꼭 토르처럼 말을 하네.”

“제가 전 상사의 전 남자친구를 닮았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뭐,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지구 표준으로, 168시간 중에 딱 한 시간. 그게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는’ 때야. 그마저도 온전히 자리를 비울 수는 없고.”

“무엇에서요?”

“우주의 모든 가능성에서.”

“철학적이네요.”

“과학적이기도 하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렇다면야 비우지 못할 것도 없어.”

막힘없이 이어지던 대담 이후 짧은 적막이 머문다. 색이 다른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린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고, 적재되었던 무거운 공기는 한순간에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지는 마요.”

달시가 말했다. 얇은 손가락이 커피 포트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쥐었다. 그는 새 잔에 커피를 가득 따라서 로키의 앞으로 밀어 건넸다.

“가끔 커피 내려둘게요.”

잔은 그의 손끝에서 마법처럼 사라진다. 공간을 넘어 어딘가로 넘어가버린 듯 이제 테이블 위에는 빈 공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예고 없이 몸을 일으킨 로키가 옷 매무새를 단정히 정돈했다.

“이 커피 맛이 그리울 거야.”

달시는 그가 더는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것은 분명한 직감이자 운명적인 예감이었다. 무게 없는 관계란 으레 그러한 법이고, 잠시간의 일탈은 한 번으로 끝내야만 후환이 없다. 로키 오딘슨, 장난의 신이자 한 번도 실체를 보인 적 없는 자는 적어도 이번 만남이 지난 이후로 다시는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살아가기를 결정한 어느 회사의 한순간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듯이, 사랑하는 모든 자를 남겨두고 시간의 끝에 남기로 결정했던 것처럼.

예고 없이 시작된 담화는 끝내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무게 없는 만남과 의미 없을 대화란 으레 기대하지 않은 순간 시작되어 맥락 없이 끊긴다. 예견된 끝에서는 누구도 작별을 고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을 실증하려는 듯 로키는 처음 이 공간에 발 디뎠던 것처럼 한순간에, 또 예고 없이 종적을 감춘다. 이제는 한 사람만의 숨소리만이 남은 적막한 방 위로는 흩어진 커피향의 입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달시는 혼자가 된 사무실 안에서 느릿느릿 테이블 위를 치웠다. 그렇게 커피의 잔향마저 사라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허공을 향해 한 번 속삭였다.

“정 외로워지거든 한 번쯤 마시러 오고요.”

문장은 그저 허공을 향해 형체 없이 흩어질 뿐이다.

​후기

안녕하세요, 이렇게 후기를 쓰고 있다는 것은 제가 제때 마감을 마쳤다는 거겠죠? 어쩐지 매번 후기를 쓸 때마다 이런 문장으로 서두를 시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즐겁게 감상하셨다면 좋겠는데, 너무 심한 날조가 들어간 건 아닌가 해서 조금 걱정도 되네요.

 

사실 처음에는 시즌2 파이널 이후 시점으로, 분신으로 온 시간선을 유랑하며 세상을 살피는 로키의 이야기가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플롯을 잡다 보니 그 사건 하나하나를 쓰는 것보다는, 자신이 이런 유랑을 해 왔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로키의 모습이 문득 보고 싶어지지 뭔가요. 처음 생각하기에는, 테라피스트 앞에서 고해하는 형식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고요. 그래서 누구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마블에 등장하며 상담사 역할도 해줄 수 있고, 거기에 로키와 모종의 접점을 빚어낼 수 있는 캐릭터가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 ‘달시’ 캐릭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우주의 달시를 불러올까 했다가, 마블 유니버스의 달시여도 좋겠다고 갈피를 잡은 뒤에는 막힘 없이 글을 쓰게 되었네요.

 

로키는 정말 십 년이 넘도록 좋아해온 불변의 최애이지만, 달시도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서로 만나 접점이 생기는 내용은 언제 적어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달시와 로키 사이에는 엄청난 공감이나 거대한 감정보다는 적당한 거리감과 이질감, 그리고 어느 정도의 몰이해가 있었을 것이기에 로키도 조금 편안하게, 가식을 한꺼풀 내려두고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키라임 파이도 먹여주고 싶었는데 마음처럼은 잘 안 됐네요. 이게 조금 아쉽습니다.

 

시즌2 이후의 로키의 코어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가장 아끼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서 시간의 끝에서 공고하게 자리를 지키며 영원을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진정한 의미의 신a.k.a.세계수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 안의 로키는 그렇게 Greater Good을 선택했음에도 여전히 결여된 부분, 마모된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자에 앉아 멸망 전의 아스가르드를 살펴보기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 분기를 바라보기도 하겠죠. 거기에 약간의 망상을 더해 한 번 정도는,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자신이 존재했었던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분신으로나마) 땅에 발을 딛고 살펴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제 마음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정말 주절주절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사람이 참 말만 많아선 안 되는데 이거 정말 큰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합작 열어주신 주최 분께 정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합작에 참여하신 분들, 독자 분들도 모두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물밀듯이 다가오는 새로운 정국 앞에서, 더 나은 삶을 향해 멋지게 살아가봐요. 결국 이 세상도 로키님이 지킨 세상이니까…….

 

사랑을 가득 담아,

마자 드림.

 

p.s. 가끔은 로키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bottom of page